252개 판결문에 등장한 피고 257명 가운데 무죄는 단 2명, 벌금형은 1명이었다. 징역형이 180건(70.0%)으로 가장 많고 집행유예는 72건(28.8%)이었다. 붙잡혀서 재판에 넘겨진다면 어떻게든 범죄기록(전과)이 남는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징역형이 선고된 사건 가운데 ▷‘1년 이상 2년 미만’ 72건(40%) ▷‘2년 이상 3년미만’ 67건(37.22%)으로 1~3년 사이가 전체의 80%에 달한다. ‘1년 미만’은 12.22%, ‘3년 이상’ 징역은 10.55%였다.
피고 가운데 141명은 형사처벌 이력이 없는 초범이었다. 이 가운데 89명은 징역형을 받았고 나머지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초범인 점은 판사가 양형 과정에서 감안하는 주요 감경요소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의 경우 피해자 수가 많고 피해금액이 크다면 초범 메리트를 기대하긴 힘들다. 피해금액이 비슷한 사건이라면 피고가 피해자들과 합의를 봤는지에 따라 징역-집유가 갈리는 양상을 보였다.
박현근 변호사는 “초범인데다가 피해금액이 적으면 재판부는 선처해준다. (합의를 통해) 피해자의 피해금액이 회복된다면 집행유예를 기대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거의 실형”이라고 말했다.
징역 살 가능성이 높다는 건 현금 수거책으로 엮인 이들이 가장 좌절하는 대목이다. 정작 범죄를 기획하고 미끼 일자리를 던진 범죄의 몸통은 잡히지 않는다는 점도 억울해 한다.
김장범 변호사는 “대개 부주의했던 건 있다. 잘못한 건 맞지만 그게 사기의 공범으로 처벌받을 수준인가는 의문”이라며 “하지만 보이스피싱이 심각하고 가만 놔두면 문제가 커지기에 밑에 있는 사람이라도 처벌하고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게 현재 사법시스템 실무의 모습”이라고 했다.
처벌하려면 법리적 근거가 필요하다. 취재팀이 살핀 판결문에선 ‘미필적 고의’ 법리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본인 행위로 인해 범죄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인식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받아들였다’는 논리다.
반대로 ‘확정적 고의’는 보이스피싱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가담한 것이다. 분석한 판결문 가운데 확정적 고의가 적시된 건 1개 뿐이었다. 확정적 고의가 명시되진 않았으나, 과거 다른 보이스피싱 범행에 연루돼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피고는 11명(재범)이었다. 이병찬 변호사는 “동종전과가 있다면 확정적 고의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죄처분을 받은 대부분의 피고에겐 미필적 고의가 적용된 셈이다. 법조인들은 재판부가 보이스피싱 사건에선 유독 미필적 고의를 광범위하게 해석한다고 지적했다.
정승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은 “미필적 고의는 ‘이게 혹시 나쁜일은 아닌가’라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특정성이 있어야 한다”며 “나쁜일은 불법 채권추심 같은 것일 수도 있는데 다수의 법원에서 ‘보이스피싱임을 미필적으로나마 생각했다’고 간주해 판결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부장판사 출신 이형주 변호사(법무법인 율성)는 비슷한 논리의 무난한 판결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많은 유죄 판결문에서 과거 판례를 언급하는데 그건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라면서 “(피고가) 보이스피싱임을 미리 인식했다라는 서술은 논리적을 비약이다”고 했다.
지난 10월 초 천안 서북구 성정동을 지나던 강철수(가명·27) 씨는 눈을 의심했다. ‘서류 대행·관공서 민원대행·채권대행 아르바이트 초보자 환영’이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대로변에 버젓이 걸려 있었던 것. 직감적으로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모집하는 위장 광고라고 느꼈다. 그는 알바자리를 구하다가 현금수금책으로 엮여 재판을 앞둔 상황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강씨는 현수막에 적힌 번호로 연락했다. ‘이준호 팀장’이란 사람은 “부실 채권을 매입하는 대행 전문업체”라며 “금융감독원에 소송이 걸려 제1금융권을 이용하기 어려운 고객들이 방문을 요청하면 찾아가는 업무”라며 복잡한 단어를 섞어가며 소개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피해자를 만나 현금을 수거할 심부름꾼을 모집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그는 곧장 천안 내 경찰서 3곳에 전화를 걸어 제보했으나 “우리 관할이 아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구청에 민원을 접수하자 하루 만에 현수막은 철거됐다. 강씨는 “며칠 동안 합법적인 구인 공고라고 여겨 연락한 의뢰인들은 꼼짝없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됐을 것을 생각하니 착잡하다”고 했다.
대면 편취 보이스피싱이 지금 이 순간도 기승을 부리지만 ‘미끼’ 알바 모집공고가 여전히 일상에서 활개 치고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에서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문자·현수막·생활정보지까지 구직자를 유인할 수 있는 ‘플랫폼’이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이미 침투했다. ‘채권 대행’ ‘법률사무소 외근직’ ‘부동산경매 업무’ 등 그럴듯한 회사를 앞세워 취업이 절박한 구직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김장범 변호사는 “현금수거책 대다수는 ‘고액 알바’를 하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라며 “이들은 자신이 제공한 노동의 대가로 보수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검·경에선) 비교적 수당이 높다는 이유로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것’이라고 간주한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모집 수법은 갈수록 감시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구직자들이 범행에 엮이는 통로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공개적으로 올라온 알바 공고였다.
그러나 구인·구직 사업자들이 ‘채권 추심’ ‘수금 알바’ 등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를 검수해 차단하기 시작하자 수법을 바꿨다. 구직자가 지원서를 제출하길 기다리는 대신, 구직자가 사전에 등록해둔 ‘공개 이력서’를 보고 문자나 메신저로 연락해 포섭한다. 이렇게 하면 구인·구직 사이트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실제로 네이버 ‘보이스피싱 피의자 정보공유 카페’에는 구인·구직 사이트 공개 이력서를 통해 일을 시작해 경찰 조사까지 받게 됐다는 글들이 매일 새로 게재된다. ‘백화점 사무보조’ ‘여행업체 외근직’ ‘법무법인 사무직’ ‘대환대출 업무’ ‘부동산 외근직’ 등 미끼로 제시한 업무도 가지각색이다. 회사의 상호와 주소는 물론 사업자등록번호까지 허위로 기재하거나 도용하는 방법으로 치밀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구직자로선 걸러낼 방법이 없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네이버 밴드 등 SNS도 단속이 느슨한 까닭에 구직자를 끌어들이는 창구가 된다.
사업자들도 이런 논란을 모르는 건 아니다. ‘보이스피싱 현금전달책 알바’에 주의하라는 공지를 올리고 인공지능(AI)기술을 바탕으로 보이스피싱 광고 키워드를 검수하고 있다. 그런데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수법을 파악해 걸러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알바천국 관계자는 “기업 회원으로 등록한 회사만 구직자의 오픈 이력서를 볼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사업자등록번호, 실제 영업 여부, 채용담당자 연락처 등 요구해 인증한다”며 “그러나 민간기업으로서 (보피 조직이) 사업자등록번호를 도용해 악용하는 것까지 수사할 권한은 없어 더 확실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와 수사기관의 보이스피싱 기조를 한 줄 요약하면 이렇다. ‘가담 정도를 막론하고, 강력하게 처벌해서 경각심을 높인다.’ 보이스피싱 범죄의 판을 짜고, 점조직을 운영하며 피해자를 낚는 총책이야 잡기만 한다면 강력한 처벌이 당연하다.
다만 감쪽 같은 가짜 알바공고에 속아 범죄에 이용된 이들도 있다. 헤럴드경제가 3부에 걸쳐 소개한 ‘인간 대포통장’(현금수거책)들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다수의 법조인, 법학자 가운데엔 “일회용 도구로 쓰이는 수거책, 전달책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건 주범 억제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병찬 변호사는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는 내는 이다. “국가가 범죄자를 양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취재팀을 그를 만나 그렇게 말하는 근거를 들었다.
“시쳇말로 ‘어그로’를 끄려는 게 아닙니다. 의뢰인을 만나고 재판에 들어가 보면 진실로 느껴지는 감정이에요. 수거책들이 잡혀서 처벌받아도 보이스피싱 일당은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피해자가 생겼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겠죠. 돈도 받아낼 사람이 필요하고요. 그러니 다들 여기만 목을 조르는 겁니다.”
취재팀이 2020년 하반기~2021년 상반기 선고된 1심 판결문 252건을 분석했더니 70.0%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77%는 1년 이상~3년 미만의 실형이었다.
이 변호사는 “보이스피싱 막겠다고 일반인을 잡아 실형 주는 게 보이지 않는 사회적 문제”라며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데 무고한 일반인이 너무 많이 엮인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면 아무리 10만~20만원 준다고 할 일반인이 얼마나 되겠는가”고 말했다.
검찰은 현금수거책을 대개 사기, 사기방조 혐의로 기소한다. 이 변호사는 수사기관과 재판부가 수거책에게 ‘미필적 고의’ 법리를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데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확정적 고의가 ‘범죄임을 명확히 알면서 이를 용인’한 것이라면 미필적 고의는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을 내심 알면서도 용인’했다는 법리다.
우리 형법은 고의가 없으면 과실로 본다. 과실이 인정되면 처벌한다. 다만 국내 법에선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을 때(과실치상·과실치사)만 과실로 처벌할 수 있다. 남을 돈을 가로챈 일반 사기범죄에선 과실로 처벌할 근거가 없다. 때문에 ‘고의는 없었음’을 증명하면 무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사기범죄는 이야기가 다르다. 검찰은 “피고가 미필적으로 보이스피싱을 인지했다”는 논리로 기소한다. 법원은 ▷취업 과정 ▷업무 방식 ▷보수 수준 등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검찰의 주장을 인정한다.
“(미필적으로나마) 고의가 있었다는 프레임을 씌우는 겁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보이스피싱에 관여하던 사람들이나 조직적으로 대포통장을 모집했던 이들은 그야말로 확정적 고의가 있어서 처벌받았다면 지금은 그런 사람은 1%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대부분 미필적 고의죠.”
이 변호사는 2018년 처음 보이스피싱 사건을 맡았다. 의뢰인은 인천에서 쌀국수가게를 하던 자영업자였다. 영업이 어려우니 단기 알바를 찾다가 코인 구매대행을 했다. 보이스피싱 사기방조로 기소됐다. 수사에 배석하면서 보이스피싱이 수사기관과 사법부에서 다뤄지는 생리를 알았다.
“‘알바를 준 이들이 보이스피싱 일당임을 (의뢰인이) 알았는지 몰랐는지가 관건’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수사관들은 자꾸 ‘뭔가 이상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나중에 판결을 보니 그 질문에 ‘이상하긴 했었다’고 말하면 처벌이 되더라고요.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면 알아봤어야 했다는 거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조사를 안 하거나 제대로 못 알아봅니다. 그러면 미필적 고의가 적용되는 겁니다.”
이 변호사가 현금 수거책의 죄를 아예 묻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확실히 알아보지 않고 부주의하게 일자리를 받아들인 책임은 있다.
“검색이라도 해보면 될 텐데 그걸 안 한 실수는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바로 징역 몇 년을 사는 건 과해요. (범죄) 예방적 효과는 집행유예만 줘도 일반인들에겐 충분합니다. 범죄에 대한 결과적 책임이든, 예방적 목적이든 실형 살게 하는 건 책임주의 원칙에 어긋합니다. 더불어 ‘이런 알바도 보이스피싱이다’라는 메시지를 널리 알리는 것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20대 이정우(가명) 씨는 지난 여름 누구나 알 만한 공기업에 합격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울감에 젖어 있다. “부럽다. 그런 안정적인 공기업 들어가서.” 주변의 축하에 애써 웃어 보이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그에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친구, 직장 동료는 물론 가족들마저 모르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부터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어요. 커서 공직생활을 할 거라고 기대했죠. 하지만 한순간 범죄자가 됐어요. 이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가능하더라고요. 속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씨는 직업군인으로 입대해 4년을 복무했다. 사회에 나가 공적 영역에서 근무하고 싶단 포부를 품었다. 지난해 말 군복을 벗고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틈틈이 공기업에도 원서를 넣었다. 구직은 만만치 않았다. 합격도 기약은 없었다. 모아뒀던 생활비가 빠르게 줄어들자 아르바이트(알바)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올해 봄 알바천국 채용공고를 훑다가 수납직원을 구한다는 ‘태은대부’라는 곳의 공고를 봤다. 채용 담당자는 “고객들에게 대출을 알선해주는 회사다. 당신의 업무는 고객들을 만나 수수료를 받아오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대부업체라 경계심은 들었지만 검색해보니 서울 양천구에 그런 상호의 회사가 존재했다. 알바천국에 적힌 회사 주소와 같았다.
일을 하기로 했다. 근무 첫날, 영등포역으로 나와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거기서 6시간을 기다린 끝에 경기도의 한 도시로 이동하란 업무가 떨어졌다. 거기서 고객 한 명을 만나 대금(800만원)을 받았고 회사에서 알려준 대로 은행 ATM으로 무통장 입금했다. 그리고 일을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당으로 20만원을 받았다.
“첫날 퇴근하려는데 추가 건을 진행할 수 있겠냐더라고요.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거절했습니다. 내적갈등을 했어요. 큰돈이 오간다는 점이 부담스러웠고 실제 일하는 시간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서 차라리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당일치기 알바는 이후 기억에서 잊혔다. 하지만 한 달 뒤 족쇄가 돼 돌아왔다. 경기도의 한 경찰서에서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으로 가담했다”며 나오라고 했다.
“조사받으면서 수사관님이 죄명을 ‘사기죄’로 적는 걸 보는데 허망했어요. 어린 나이지만 직업군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사기라니….”
이씨는 헤럴드경제가 ‘인간 대포통장’ 기획 보도를 준비하며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 피의자 가운데 한 명이다. 가짜 취업공고에 속아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됐다. 심부름꾼으로 쓰이고, 꼬리 자르기를 당했다. 보이스피싱임을 알지 못했다고 항변해도 재판에 넘겨지면 10명 가운데 9명 이상이 징역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한 명의 피해자만 남긴 이씨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취재팀이 만난 피의자들은 우스갯소리로 “최대한 빨리 체포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다. 피해자와 피해금이 많다면 형량은 더 높아진다. 형사처벌 전력이 전혀 없더라도 수사기관과 법원은 ‘강력처벌’을 내세운다.
이씨는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피해자와 합의할 계획이다. 그래야 재판부의 선처를 기대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엔 ‘언제라도 전과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웅크리고 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취업, 연애 걱정을 늘어놓으며 속상해하지만 공감이 안 된다. 검찰은 이씨의 사건을 ‘보완 수사’를 요구하며 경찰로 다시 내려보낸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