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국 함정’이란 개발도상국이 경제 발전 초기에는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 와서는 어느 순간 성장이 장기간 정체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지난 2006년 세계은행이 어느 보고서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당시 소득 수준이 4000∼1만 달러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국가들을 빗대서 한 말이다.
많은 국가가 이 함정에 빠지는 것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더이상 생산요소인 노동과 자본의 투입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요소의 투입보다는 ‘혁신’과 ‘개혁’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즉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육성하고 사회의 잘못된 것을 뜯어고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중진국 함정에 빠진 국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필자는 중진국 함정의 기준을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2만 달러로 올라서지 못한 나라로 정의해서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헝가리·폴란드·러시아·카자흐스탄·멕시코·아르헨티나·말레이시아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편의상 총인구 1만명 이하의 국가와 중동 산유국은 제외했다. 이 국가들은 소득 수준이 2000년 초중반이나 2010년경에 1만 달러 대에 진입했지만, 12년에서 18년이 지난 지금도 2만 달러는 고사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 국가들이 이러한 함정에 갇히는 이유는 각자 사정이 달라서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인근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경우를 보자.
말레이시아는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경제부국이다. 1980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1인당 소득이 2011년 1만 달러를 달성한 이후 지금까지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현재 소득 수준은 우리나라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소득 수준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 지난 몇십 년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외환위기의 극복 과정을 보자. 말레이시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에 직면했으나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거부했다. IMF가 제시한 요구사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을 통제하고 자국 통화를 달러에 연동하는 환율제도를 채택했다. 즉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는 임시방편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전대미문의 외환위기를 맞아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개혁을 통해 경제의 체질을 바꾸면서 3년 만에 외환위기를 완전히 극복했다.
제조업 기반 시설에서도 두 나라 간에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반도체산업을 보자. 말레이시아는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2%로 우리나라의 16%보다 높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낮은 임금을 기반으로 하는 반도체 조립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로 부가가치가 낮고 경제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과감하고도 선제적인 투자를 통해 독보적인 기술과 함께 고부가가치인 반도체 제조산업을 확보하고 있다.
이처럼 말레이시아는 쉬운 길을 택하면서 현실에 안주함으로써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대한민국은 개혁과 혁신이라는 힘든 길을 택한 덕분에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에 진입한 모범적인 국가가 되었다는 평가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국제사회는 수년 전부터 일관되게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온전히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고 안심하면 큰 오산이다. 유럽의 그리스와 포르투갈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2000년대 중반에 2만 달러대로 진입하여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성장의 길을 걸었다.
일본 도쿄항 아오미 컨테이너 터미널[AFP] |
그러나 이 두 나라는 그 이후 국가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해 뒤늦게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 재정위기의 원인이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 사용이라는 유로존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들 두 나라는 다른 회원국에 비해 경제개혁 대신 유동성을 바탕으로 과잉복지 정책에 집착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재정위기 극복 과정에서도 안이한 자구책을 내놓으면서 다른 회원국들과 많은 갈등을 겪었다. 현재 이들 두 나라의 소득 수준은 2000년대 중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일본의 사례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 거품 붕괴로 경기침체가 지속되자 정부를 비롯한 경제주체들은 거품 붕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과거 성공 신화에 매몰됐다. 과감한 구조조정 대신 거품을 초래한 기존 시스템에 안주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즉 경제가 공급과잉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 노력 없이 공공투자 확대, 금리 인하 등 수요를 인위적으로 부양하는 전통적인 대응책만으로 일관해 불황의 조기 극복에 실패했다. 이와 함께 1990년대 중반 들어 급속한 인구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경제활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잃어버린 20년, 30년을 자초했다.
위의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도 이들 나라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는 저성장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있다. 경제성장률은 2000년대 들어 4∼5%로 낮아졌고 급기야 2023년에는 1%대로 주저앉았다. 머지 않은 장래에는 마이너스 성장마저 예상된다.
중국의 기술 추격은 갈수록 거세다. 중국은 ‘제조 2025’를 기치로 첨단제조업을 중심으로 기술 자립과 공급망 내재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철강·석유화학·조선은 물론 반도체·모바일·이차전지 등 우리 주력산업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인구 절벽 위기에 놓여있다. 최근 인구 위기는 사회가 붕괴할 때 나타나는 괴멸적 수준에 이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장래에 생산가능인구의 비중은 세계 최하위로 추락하고, 고령인구의 비중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될 것이다. 기업은 투자처를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찾고 있다. 우리 기업의 해외직접투자는 2000년대 100억 달러 내외에서 최근에는 660억 달러로 무려 6배나 증가했다. 해외투자 급증은 경제성장 둔화와 더불어 일자리 감소로 직결될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 부진은 크게 외부적 경기적 요인과 내부적 구조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다. 최근 한국경제의 부진은 이들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 부진의 원인을 외부적 경기적 요인에서 찾는 것은 그 대응 또한 단기적이고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제 부진의 원인을 내부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으로 바라보면서 혁신과 개혁을 통한 경쟁력 강화라는 방향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대한민국 앞에 어찌 쉬운 일만 있겠는가. 힘들다고 당면한 문제를 회피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지난날 그래왔듯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면서, 혁신과 개혁에 발벗고 나선다면 대한민국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더 강해질 것이다.
신승관 헤럴드 고문 프로필
연세대 경제학 박사(1999)
재정경제부 거시경제자문위원(2003~2004)
한국은행 외환자문위원(2005~2006)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장(2017~2019)
한국무역협회 전무이사(2019~2022)
경희대 객원교수(2024~현재)
헤럴드 고문(2024~현재)
bigroot@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