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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 무제 [National Gallery of Art]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시그램 빌딩 직원한테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응."
"아, 진짜. 왜 그래요!"
1959년, 미국 뉴욕. 마크 로스코와 조수가 입씨름을 했다. "그러니까 그 계약은 이제 없던 일인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로스코 씨!" 로스코의 말에 조수가 소리쳤다. "그게 얼마짜리 사업인 건지 알고 있어요? 눈 딱 감고,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되잖아요!" 로스코는 그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니, 미치겠네. 대체 왜 굴러들어오는 돈을 발로 차는 거예요?" 조수가 머리를 싸맸다. 당혹감에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로스코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해 줘.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나는 할 수 없어. 도저히…. 할 수가 없어."
"계약금은 3만5000달러(현재 기준 약 250만달러·32억원), 선불은 7000달러. 로스코 씨, 이렇게 하실까요."
"그러시죠."
1년 전, 주류회사 시그램(seagram) 측과 로스코는 악수를 했다. 시그램은 뉴욕 중심부에 호화 빌딩을 세우기에 한창이었다. 34층 규모였다. 시그램 측은 빌딩의 얼굴이 될 1층 레스토랑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최고급 식기, 최고급 음식, 이와 함께 최고급 예술품을 감상할 기회까지 주고자 했다. 그래서 로스코를 불렀다. 그는 잭슨 폴록에게 추상표현주의의 키(舵)를 넘겨받은 대가였다. 로스코는 현장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그는 골똘히 생각을 쌓아 올리는 듯했다. 로스코는 계약 직후 레스토랑 크기만한 초대형 작업실을 꾸렸다. "시리즈로 3개, 작품으로 30~40점을 그릴까 해. 레스토랑 벽이 다 채워질 수 있도록." "그래요? 그런데, 로스코 씨…. 괜찮아요?" 조수는 그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순간 싸했다. "왜, 뭐?" 로스코가 시치미를 뚝 떼며 표정을 고쳤다. 어휴, 계약금이 얼마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조수는 불안감을 밀어넣고 돌아섰다. 로스코는 붓을 잡았다. 뼈대는 다 짰다. 이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아니, 그렇게 될 것으로 보였다.
뉴욕 시그램 빌딩 [commons.wikimedia.org] |
8개월이 흘렀다.
로스코는 그간 꽤 열심히 그렸다. 남에게 작업물을 굳이 보여주진 않았지만, 종일 매달리는 건 확실했다. 로스코는 이쯤 쉼표를 찍었다. 휴가를 갔다. 이탈리아 피렌체였다. 그런 로스코는 여객선에서 우연히 작가 존 피셔를 봤다. 시간은 많았다. 로스코는 피셔에게 '시그램 빌딩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그는 이날, 이번 작업에 대한 속내를 드러냈다. 조수도 끝내 알아채지 못한 진짜 속마음이었다.
"…실은 말이야. 나에게 이 제안은 도전이야."
"도전?"
"나는 아주 악의적인 의도를 품고 있어." 로스코가 씩 웃었다.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모든 개자식의 식욕을 망칠 그림을 그리고 싶어. 만약 시그램 측이 내 그림을 걸지 못하게 한다? 그거야말로 최고의 업적이 될 거야." 로스코는 눈을 반짝였다. 마치 그런 일이 꼭 벌어지길 바란다는 듯. 로스코는 레스토랑을 둘러본 첫날부터 이런 위험한 생각을 했다. 공간은 너무 사치스러웠다. 졸부들이 딱 좋아하는 구조인데, 여기에서 예술품을 감상하겠다고? 남이 찬 시계나 훔쳐보느라 정신없겠는데. 로스코는 몸서리를 쳤다. 여기에서 으스대고 있을 졸부와 아첨꾼이 벌써 꼴 보기 싫었다.
마크 로스코, 무제, 씨그램 벽화 연작, [DIC가와무라 미술관] |
로스코는 이들에게 최악의 추억을 안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렇게 검은색, 검붉은색, 검은 밤색 따위 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겪은 모든 비극적 경험을 녹여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1542년에 설계한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내 계단 방도 참고했다. 모든 창, 모든 문이 막혀있는 구조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으로 '나는 모든 문과 창이 벽돌로 막힌 방에 갇혀있다. 할 수 있는 건 벽돌에 영원히 머리를 부딪히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을 이끌었지. 나도…." 로스코는 이런 말도 했다. 온갖 갑갑한 색을 내세워 싹다 체하게 해주겠다는 다짐 같았다.
마크 로스코, 무제, 씨그램 벽화 연작 [테이트 모던 갤러리] |
돌아온 로스코는 경악했다.
그는 다 지은 포시즌스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음식을 먹다가도 기가 찼다. 눈앞 풍경은 생각보다 더 별로였다. 레스토랑은 호화판이었다. 윤기나는 장식품에 그림을 둘 곳도 없어보였다. 손님들도 가관이었다. 다들 자기가 더 잘났다고 말하는 듯 소리치고 거들먹거렸다. 먹고 마시기에 바빴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겸손한 부자, 품격 있는 사업가는 역시나 없어보였다. 이 인간들은 여기서 예술품과 교감할 준비가 돼 있는가. 그림을 아예 보지도 않을 듯한데, 그러면 그냥 다 의미 없는 일 아닌가. 로스코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이렇게 호화로운 곳을 찾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제대로 볼 리가 없소." "네?" "나는 이 작업을 하지 않겠소." 그의 통보였다. 로스코는 그림의 순결성이 아까웠다. 이들은 골탕 먹을 자격마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선불금을 돌려줬다. 계약금도 쿨하게 포기했다. "미쳤어? 돈이 얼마인데…." 주변 사람들이 말렸다. 요지부동이었다. 추상표현주의 거장, 로스코는 그렇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
마크 로스코, 가족 [National Gallery of Art] |
1903년, 로스코는 그 시절 환영받지 못할 핏줄을 타고났다.
로스코는 라트비아(당시 러시아제국) 다우가스필드에서 세상 빛을 본 유대인이었다. 곧 나치즘이 고개를 들 만큼 반(反)유대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였다. 1913년, 로스코 집안은 결국 눈총을 못 견디고 짐을 쌌다. 바다를 가로질렀다. 미국이었다. 서부 북쪽 끝, 동유럽 유대인 공동체가 있던 포틀랜드였다. 그가 10살 때였다. 한창 여린 시기, 로스코는 고난에 직면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미국에 오고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수완도 없고 고지식했지만, 가장의 책임감을 갖던 그가 돌연 사망했다. 대장암이었다. 이제 온 가족이 일터로 나섰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문 배달 등 잡일을 했다. 그렇게 받은 동전으로 겨우 식은 빵을 먹곤 했다.
로스코는 온갖 차별도 겪었다.
유대인에 이민자, 가난한 집안 등 그 시절 '만만한' 조건은 모두 갖춘 상태였다. 미국도 정도만 달랐을 뿐, 비주류를 향한 차별적 분위기는 상당했다. 로스코는 링컨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우등생이었다. 조기졸업 대상자가 될 만큼 명석했다. 1921년, 로스코는 이어 명문 예일대학교에 등록했다. 이번에도 전액 장학생이었다. 엘리트를 향한 탄탄대로였다. 겉으로는 그래보였다.
마크 로스코, Contemplation [National Gallery of Art] |
그러나 로스코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늘은 계속 짙어졌다. 로스코는 고등학생 시절 8년간 인종 차별을 겪었다. 배운 청년들이 모인다는 예일대는 다를 줄 알았는데, 이 자식들이 더 나빴다. 정의로운 척, 진보적인 척하며 뒤로는 모욕을 주고 배척하는 위선이 가관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중심지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쯤 미국은 특히나 유대인 이민자를 경계했다. 음흉하게 기득권에 파고들어 털어먹고 간다더라는 식의 유언비어도 퍼질 때였다. 로스코는 똑똑한 유대인 이민자였다. 사실상 대학 내 요주의 인물 1호였다. 그는 결국 2학년생일 때 예일대를 그만뒀다. 로스코는 이쯤부터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위선이라 하면 치를 떨게 된다.
로스코는 뉴욕의 공기를 들이켰다.
로스코는 이 도시에서 운명의 만남을 가졌다. 상대는 예술이었다. 경리와 재단사 등 일을 전전한 로스코는 어쩌다 친구 집을 방문했다. 로스코는 그곳에서 친구가 작업하는 드로잉 몇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묘한 해방감에 젖었다. 낯선 경험이었다. "저게 뭐야?" 로스코가 물었다. "인체 드로잉을 연습하고 있어. 너도 해볼래?" "나도 할 수 있어?" "응? 그림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 누구든…. 로스코는 그날 이후 예술에 관심을 쏟았다. 급기야 친구가 다닌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 찾아가 2년간 실기공부를 했다. 로스코는 그렇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렘브란트, 야경 |
그의 그림은 색감으로 만들어진 소용돌이 같았다.
자유로운 색채가 곧 캔버스를 뚫고 나와 대상을 집어삼킬 듯했다. 이 화가의 이름은 막스 웨버였다. 색채의 권위자 앙리 마티스에게 배운 웨버가 로스코를 가르쳤다. 웨버는 로스코에게 유럽 현대 회화를 알려줬다. 입체파의 형태 해방, 야수파의 색채 해방을 지도했다. 고전 화풍과 거리가 먼 웨버에게 영향을 받은 로스코는 평범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예쁘게 그린다', '보이는대로 그린다'는 옛날 방식 말고, '철학적으로 그린다', '느끼는대로 그린다'는 요즘 방식에 몰두했다. 외려 그간 배운 게 없었기에 이런 현대 미술 정신을 더 쉽게 빨아들일 수 있었다. 로스코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렘브란트 반 레인의 애환이 담긴 여러 그림도 자주 봤다. 파울 클레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작품도 즐겨 감상했다. 이들의 손길을 보다 보면 속에서 무언가가 마구 차올랐다. 느낀 바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를 통해 감상자와 교감하는 것. 로스코는 웨버의 가르침, 렘브란트와 클레 등 거장이 건넨 힌트를 갖고 자기만의 철학을 정립했다. "나는 예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 왔다." 로스코 평생의 예술관은 이 말로 요약된다.
마크 로스코, 지하철 판타지 [National Gallery of Art] |
늦깎이 화가 로스코는 차가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민할 겨를도 없었다. 그가 겪은 차별, 우린 모두 하나라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내걸고선 실상은 자국 엘리트주의에 찌든 위선을 고발하고 싶었다. 슬픔과 좌절, 분노와 체념의 감정도 녹여 교감하고 싶었다. 1940년, 로스코는 그런 마음으로 그림 '지하철 판타지'를 그렸다. 길쭉하게 표현된 사람들은 어딘가 기괴하다. 표정도 없고, 어떤 의미있는 행동도 보이질 않는다. 그저 앞을 보고, 벽을 보고, 땅을 보고 있을 뿐이다. 분위기는 삭막하다. 분명 서로에게 조금의 호의도, 관심도 없을 듯하다.
앵그르,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
그런데 무언가 아쉬웠다.
로스코는 자기가 느낀 온갖 감정을 감상자에게 더 깊게 안겨주고 싶었다. 더 처절하게 느꼈으면 했다. 로스코는 새로운 문법을 탐색했다. 그는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 비극을 공부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도 탐독했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해줬다고 주장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눈을 뽑는다. 아가멤논은 어쩔 수 없이 딸을 산 제물로 바친 후 아내에게 살해된다. 이런 비극 속 숭고함이 읽는 이에게 '감정의 해소'를 경험하게 해준다는 얘기였다. 로스코는 이제 그리스 비극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자기 그림을 본 사람들이 웃고, 울고, 분노하고, 절망하길 원했다. 그런 체험으로 마음속 공허함을 충만함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랐다.
마르크 샤갈, 생일 |
앙리 마티스, 빨간 작업실 |
뜻을 굳힌 이상 그대로 직진해야 했다.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예술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가 더 기발한지, 누가 더 파격적인지를 놓고 경쟁이 있을 참이었다. 수백년간 이어진 순수 미술의 아성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많은 예술가가 나치의 검열을 피해 뉴욕으로 몰려왔다. 특히 마르크 샤갈,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차츰 주목받을 모습이었다. 로스코는 하루빨리 그만의 그림이 필요했다. 그런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걸린 마티스의 '빨간 작업실'과 마주했다. 이 그림은 붉은색이 주인공이었다. 액자도, 의자도, 화병도 아닌 색채 자체가 작품의 주연 배우였다. 오…. 로스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붉은색을 통해 마티스의 고집스러운 삶을 엿본 것 같았다. 색채만으로 교감했고, 색채만 갖고서도 체험했다. 답이 나왔다. 이제 그가 매달릴 건 색채였다.
잭슨 폴록, no.5 |
추상표현주의는 예술가의 정신을 캔버스에 담는 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전통 회화처럼 눈앞 대상을 그리는 데 몰두하지 않고, 예술가의 정신세계(추상)를 자기 방식대로 그리는(표현) 데 집중하는 화풍이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으로 이미 가능성을 본 기법이다. 로스코는 자기가 갈 길로 추상표현주의를 골랐다. 마티스에게 영감받은 로스코는 아예 색채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오묘한 색면만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그간 숙성해온 여러 감정을 그 안에 꾹꾹 눌러 담기로 결심했다. 훗날 사람들은 여러 색과 면이 오간다는 뜻에서 '멀티폼'(다층 형상)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로스코는 그림 속 사물을 지웠다. 액자, 의자 등 소소하고 사소한 소품까지 다 없앴다. 이는 만든 이와 보는 이 사이 교감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판단했다.
마크 로스코, 무제-흰색과 빨강 위의 보라, 검정, 오렌지, 노랑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
로스코의 시도는 먹혔다.
1945년, 로스코는 유명 미술품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과 의기투합했다. 그는 구겐하임 소유의 금세기 미술 화랑(Art of This Century Gallery)에서 개인전도 했다. 성공의 증표였다. 로스코는 차츰 명성을 얻었다. 몸값도 조금씩 비싸졌다. 그 시절 로스코의 대표작은 '무제, 흰색과 빨강 위의 보라, 검정, 오렌지, 노랑'이다. 거대한 화폭 위 칠해진 여러 색상은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붉은색과 노란색은 주황색을 통해 이어지려는 듯했지만, 수평의 검은색이 이를 매몰차게 가로막고 만다. 밝은 이 그림은 얼룩, 연기, 그을린 자국 같은 찰나의 검은색으로 인해 밝음을 잃었다.
이 악당 같은 검은색의 정체는 무엇인가.
학대, 차별, 전쟁, 학살…? 사람들은 자기가 떠올릴 수 있는 최악의 오점을 생각하며 교감한다. 그 결과, 많은 이가 북받치는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몸서리를 친다. 로스코는 감상자와 자기 그림 사이 45㎝의 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그림 작업을 할 때와 같은 거리다. 그 간격에서 눈을 뜨면, 감상자도 자신과 같은 영적 경험을 할 것으로 믿었다. "말은 감상자의 상상력을 마비시키기에, 침묵이 더 낫다." 로스코는 '그림 제목이 왜 죄다 무제인가'라는 물음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제목 또한 선입견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치부했다.
마크 로스코, 무제, National Gallery of Art |
마크 로스코, Red Band [National Gallery of Art] |
마티스에 푹 빠진 로스코는 화폭 속 색채 덩어리를 2~3개로 차츰 줄였다.
모양은 사각형으로 다듬었다. 로스코는 이 모습이야말로 사각 화폭 위에 그려질 수 있는 가장 무형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이 덩어리가 각각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도록 테두리를 스펀지로 뭉개는 수고도 피하지 않았다. 로스코는 그렇게 그만의 문법 찾기에 성공했다. 교감하기 위한 최적의 방식을 찾았다. 평론가들은 "로스코가 색채 표현을 극대화한 예술을 선보인다"고 했다. 다만 로스코는 이에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 대신 비극이나 운명, 혹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고 설파했다.
마크 로스코, no.8 [National Gallery of Art] |
앤디 워홀, Marilyn Diptych [Tate Gallery, London] |
로스코는 일명 '시그램 사건' 이후 맥이 빠졌다.
로스코는 예술품이 졸부들의 장식품 내지 안줏거리 치부를 받는 일이 더 많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에 전 세계 돈이 쏠렸다. 그만큼 젠체하는 졸부와 아첨꾼도 줄줄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로스코의 계약 취소는 그저 해프닝일 뿐이었다. 로스코의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1960년대 들어 앤디 워홀 등이 팝아트를 두르고 키치(Kitsch) 예술을 선보였다. 로스코는 팝아트가 천민자본주의를 부를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경멸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은 달랐다. 로스코의 태도와 달리 팝아트는 큰 환영을 받았다. 곧 대세가 될 기류였다.
마크 로스코, 오렌지와 노랑 [올브라이트녹스미술관, 버펄로] |
1961년, MoMA는 로스코 그림을 앞세워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엄청나게 흥행했다. 그런데도 로스코는 계속 침울했다. 그는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 쉽게, 더 대중적이게'를 내건 팝아트의 돌풍은 성실하게 덩치를 불려갔다. 지금이야 내 그림에 열광할 수 있지. 하지만 곧. 로스코는 고민했다. 일단 사람들이 내 그림을 봐야 교감이든, 소통이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내 작품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시대가 오면 아무 의미 없지 않은가. …그때는 난, 무엇을 해야 하지?
마크 로스코, 빨강 속, 네 가지 어둠 [뉴욕 휘트니 미술관] |
그는 날카로워졌다.
팝아트 등 새로운 화풍을 조명하는 기사, 자기 작품에 대한 부정적 기사를 보면 틀림없이 그날 하루를 망쳤다. 로스코에게 '시그램 사건'은 기폭제로 작용했다. 앞으로는 시그램 측 같은, 그림을 졸부들의 인테리어 소품 따위로 전락시킬 주문 의뢰가 많아질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매번 계약 거절 또는 취소만 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그런 로스코는 1964년, 운명적인 작품 의뢰를 받았다.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드 메닐 부부는 미국 텍사스주 남동부에 있는 휴스턴에 예배당을 지으려고 했다. 이 부부는 여전히 로스코의 색채를 믿었다. 그의 색 덩어리가 과거와 현재, 미래 그 어떤 화풍보다 '종교적 체험'을 하기에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했다. 로스코도 감정이 차올랐다. 로스코가 볼 때 이들은 새로운 광풍에 몸을 내맡기지 않은 마지막 촛불 같았다.
로스코는 가족과 전우를 모두 잃은 노병처럼 작업에 몰두했다.
로스코와 그의 조수들은 흑색과 밤갈색 페인트를 양손 가득 챙겨왔다. 로스코는 또다시 거대한 백지 앞에 섰다. 한 겹, 두 겹, 세 겹…. 페인트를 칠했다. 질리고 지치도록 덧발랐다. 로스코는 때때로 눈을 감았다. 평생 벗어날 수 없던 차별의 굴레, 지독히도 꼴 보기 싫은 아첨꾼의 위선, 1·2차 세계대전이 안긴 화염과 분노, 경제 대공황이 남긴 최악의 빈부격차를 떠올렸다. 신을 찾고, 신을 원하고, 신을 원망했던 그 순간을 되새겼다. 로스코의 손끝에서 짙은 검은색이 피어났다. 압도적 깊이감의 암흑이 넘치듯 밀려왔다. 무한한 심연, 감당할 수 없는 블랙홀이 넘실댔다.
로스코 채플. [rothkochapel.org] |
로스코는 사라지기 직전 가장 밝게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정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검은색 가로선과 세로선 배치를 놓고 0.3~0.5cm의 조정을 하느라 계속 사다리를 오르내려야 했다. 그 길이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솔직히 의아했다." 언젠가 로스코의 조수는 스승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섬세함의 화신 같던 로스코는 이번 작업에서 특유의 예민함을 폭발시켰다. 그는 4년간 패널화 14점과 대안으로 쓸 수 있는 4점을 함께 만들었다. 여기까지 온 그대여. 오직 그대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우주와 교감하라. 나를 만나든, 신을 만나든, 그대 자신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을 해보라. …내가 그대를 이끌어 주리다. 로스코의 그림은 이런 말을 건네는 듯하다. 1971년에 완공되는 이 예배당은 '로스코 채플'로 불린다. 다만, 정작 로스코는 작품이 예배당에 걸리는 걸 보지 못하게 되는데….
마크 로스코, no.5 [National Gallery of Art] |
이쯤 로스코는 모든 승객을 대피시킨 후 조타실에 홀로 남은 선장 같았다.
대세에 편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건 미련한 짓으로 보일 수 있었다. 내가 내 신념이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정말 세상에서 둘도 없는 바보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로스코는 끝내 색면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평온을 찾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로스코의 색채는 더욱 어두워졌다. 검은색 덩어리가 입을 쩍 벌려 보는 이를 집어삼킬 듯도 했다. 그에게서 따뜻한 주황색, 우아한 노란색, 웅장한 짙은 녹색 등은 찾기가 힘들었다.
마크 로스코, no.4 [National Gallery of Art] |
예배당 작업 전후로 로스코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거듭된 고민이 낳은 우울감에 눌린 로스코는 계속 과음했다. 줄담배를 피웠다. 로스코의 친구는 당시 그에 대해 "늘 안절부절못했다"고 회상했다. 1968년, 로스코는 대동맥류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안정을 취하라고 거듭 청했다. 그는 그 말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그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2년 후인 1970년 2월25일, 로스코는 죽었다. 깜빡 잊은 일이 갑자기 떠오른 사람처럼 돌연 극단적 선택을 했다. '로스코 채플'이 지어지기 1년 전이었다. 로스코의 조수가 부엌 싱크대 앞 바닥에 쓰러져 숨진 화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67세였다. 유서도 없었다.
로스코 앞에는 그의 마지막 그림이 있었다.
화폭에는 붉은색이 있었다. 그에게 영감을 준, 그를 정점으로 이끌어 준 마티스의 '빨간 작업실' 같은 색채였다. 로스코는 슬럼프 후 검은색을 분신처럼 여겨왔다. 그런 그가 정작 최후의 작품 앞에서는 검은색을 한 톨도 쓰지 않았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옛 영광의 색채가 여전히 굳건한지 보고 싶었을까. 그 기운을 지렛대로 삼아 일어서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피날레였을지도 모른다. "심장박동, 열정, 동맥혈, 마당에 세워둔 자전거에 내려앉은 녹, 폭풍처럼 번지는 불, (...) 용암, 갯가재, 전갈, 불꽃, 죽은 야수파 화가들…." 언젠가 로스코는 붉은색을 이렇게 비유했다. "나는 내 작품에 대해 변호할 뜻이 없다. 내 작품은 스스로를 방어한다(스스로 얘기한다)." 로스코는 자기 작품을 놓고서 이렇게도 설명했다. 교감의 힌트를 잔뜩 던져놓은 그였으나, 해석은 그대 알아서 하라는 말로도 들린다. '검은색에서 빠져나와 살고 싶다'는 숭고함을 느끼든, '붉은색에 잠겨 죽고 싶다'는 절절함을 느끼든, 모두 당신 몫이라고.
마크 로스코 |
the East Building’s Tower 1 gallery features a rotating series of paintings by Mark Rothko, [National Gallery of Art] |
"눈물, 액체로 된 포옹."
"밤을 향해 열린 창문들 같다."
"형상과 형태를 찾느라 둥둥 떠다니는 면들 속에서 길을 잃었다." (로스코 채플에 있는 방명록 중 일부)
미국 내셔널 갤러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예술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 있는가'라는 질문에 약 60% 사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어떤 작품에서? 이들 중 70%는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운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로스코도 로스코 채플에서 자기 그림을 봤다면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았을까. 그로서는 특히 더 만감이 교차했을 그 순간이 있었다면, 그의 마지막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참고자료〉
마크 로스코, 제이콥 발테슈바, 마로니에북스
마크 로스코, 강신주, 민음사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 (2023. 5. 20.)
2)“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 (2023. 6. 10.)
3)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 (2023. 6. 17.)
4)“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 (2023. 6. 3.)
5)“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 (2023. 5. 27.)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4)“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5)“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6)‘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7)“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8)“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9)“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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