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 광복회장의 부모인 김근수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
김원웅 광복회장의 부모인 전월선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
김원웅 회장이 광복회장에 당선된 것은 그의 부모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 회장은 조선의열단과 조선의용대 활동을 했던 김근수 선생(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과 전월선 선생(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슬하에서 태어났다.
1944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나 대전광역시에 정착한 김 회장의 집에는 항상 많은 애국지사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김 회장은 곁에서 봐왔던 부모님과 애국지사들의 모습에서 ‘당당한 삶’의 필요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부모님 모두 조선의열단,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거치면서 무력 독립 투쟁을 하셨어요. 제가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독립운동 중에 아버지를 만나셨어요.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남겼던 말들은 김 회장의 가슴에 아직도 깊이 남아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학생이던 김원웅 회장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그때 부친 김근수 선생과 모친 전월선 선생이 아들을 보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를 찾았다.
당시 정부는 ‘더 이상 학생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반성문을 쓰면 석방을 약속했었다. 많은 투옥인사들이 반성문 회유에 응했고, 풀려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를 거부했다. 형무소를 찾은 김 회장의 양친도 김 회장에게 ‘그냥 각서를 쓰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김 회장의 거부의 뜻은 완강했고 아버지도 김 회장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김근수 선생은 아들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원웅아, 힘이 없는 정의는 허무한 것이다.”
이후 수십년이 지났지만 김 회장은 이 한마디를 아직 기억한다. 김 회장은 아버지의 이 말을 정의를 구현하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일제강점하, 독립은 정의였고 독립운동은 옳은 일이었지만, 힘이 없는 독립운동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지독스럽게 깨달았을 독립운동가 아버지가 던진 말이었기에 그 울림은 더 컸다.
김 회장이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부친은 또한번 가슴에 남는 한마디를 남겼다. 아들의 정치입문을 말렸던 김근수 선생이 모처럼 아들의 선거사무실을 찾았다. 그러나 선거일정으로 분주했던 아들을 만나지 못했고, 대신 ‘무사직강(無私直强)’ 네 글자를 자리에 남겨놓고 사무실을 떠났다. ‘사사로움이 없어야 곧은 심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였다.
김 회장은 14대 총선 당선 이후 19년간 정치 생활을 하면서도, 부친 김근수 선생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생활했다. 김 회장은 “정말 당선만을 쫓았으면, 다른 정당에서 정치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정치를 하며 생각했던 목표는 소신을 갖고 대한민국 ‘3김 정치’와 지역주의를 철폐하는 것이었어요. 선거때도 의정활동을 할 때도 소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가르침 ‘무사직강’을 자신의 삶과 생활 속에 녹인 결과다.
의정활동 기간에는 ‘힘을 갖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뛰었다. 김 회장은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폈다. 의원들 사이에서 별달리 인기가 없는 상임위였지만 힘있는 나라를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상임위가 외통위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외통위 소속으로 16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문제 해결에 전력했고 17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김 회장은 당시 논란이 됐던 스크린쿼터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고, 스크린쿼터제를 지켜냈다.
김 회장은 “국회 외통위에서 활동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도 멀리하고, 다양한 외교문제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목소리도 낼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고 회고했다.
김성우 기자/zzz@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