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문화 선비들에 유행
겸재 그림에도 시구 그대로
박제가·靑나라 화가 교유등
회화로 듣는 시대 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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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회화·문학 아우른
한국학자들 연구 집대성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난해한 현대미술을 말할 때 명제처럼 흔히 쓰이지만 기록과 정보의 수단이기도 한 그림을 해독하는 일은 과거를 이해할 때 더 유용해 보인다. 남아있는 정보가 부족한 시대를 증언하는 결정적 코드가 그림 속에 숨어있기도 하고 때로 잃어버린 고리의 발견으로 자욱한 시대의 혼돈을 걷어내기도 하는 까닭이다. 한 장의 그림이 역사를 재구성하고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 줄 수도 있다.
한국학을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문학자 27명이 옛 그림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옛 시가와 문집들 속에서 선조들의 멋과 지혜를 건져올리고 있는 국문학자 정민, 한문학자 안대회, 사학자 김문식, 중국고전문학자 안상복, 서지학자 옥영정, 한국회화사 유재빈 교수 등 공부모임 ‘문헌과 해석’을 통해 학문적 교류를 해온 이들이다.
무엇보다 문학, 회화, 공연, 철학, 역사 등 전공분야를 넘나들며 그림의 속살을 헤집고 한국학의 다양한 주제들에 접근해 끌어올린 성과들이 만만치 않다.
정선의 ‘만폭동도’를 바위에 글을 새기는 문화와 연관지어 해석한 고연희의 글은 흥미롭다. 금강산의 절경을 그린 그림 중 으뜸으로 꼽히는 정선의 ‘만폭동도’에는 뜬금없이 고개지의 시구가 적혀있다. 중국 동진의 화가 고개지의 시구가 왜 그림의 제화시로 보란듯이 적혀 있는 걸까. 이를 좇다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긴, 바위 위에 글을 새기는 제암문화가 얼마나 만연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고개지의 ‘천암경수 만학쟁류(千岩競水 萬壑爭流)’란 시구는 산수경치를 표현하는 일종의 상투구로 조선 문인들은 산천에 들면 그곳이 어디이든 이를 읊어댔다. 금강산 만폭동 바위 한편에도 이 여덟자가 새겨졌다. 너럭바위에 새겨진 많은 글들 중 양사언의 필적 ‘봉래풍악 원화동천’과 ‘만폭동’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한다. 정선이 그린 ‘만폭동도’의 고개지 시구는 김수증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김수증은 정선의 그림 후원자였던 김창협 형제의 숙부이자 정선의 산수유람을 이끌어준 인물이다. 김수증의 제암은 이 그림의 주제를 만폭동 풍경 그 자체에서 김수증의 제화시가 새겨진 절경으로 바꿔놓았다. 말하자면 김수증의 인증 그림인 셈이다.
실학자로 유명한 박제가의 초상화 한 점은 청나라 화가 나빙과의 애틋한 관계를 보여준다. 청대 회화사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양주화파의 주요 일원인 양봉 나빙이 그린 이 초상화는 원작은 전하지 않고 후지츠카 기증 자료 중에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그림 속 박제가의 풍모는 당당하고 기운차 보인다. 한 눈에도 맵차고 총총한 눈매와 옅은 미소가 매력적이다. 나빙은 박제가의 이 초상을 그리기에 앞서 묵매 한 폭을 그려 박제가에게 주었는데 굵고 힘찬 가지 위에 활착 핀 매화들이 나비의 군무처럼 화려하고 생생하다. 진부한 습속을 버리고 개성적인 문학을 일군 박제가와 세속에 아첨하지 않은 나빙의 17년이란 나이차를 넘어선 뜨거운 예술적 교유가 숨쉰다.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 우측 상단에 고개지의 시구가 적혀있다. [그림제공=태학사] |
18세기 문인들 사이에서는 마음 맞는 벗들과 더불어 즐기는 멋진 만남을 그린 그림이 유행했다. 이런 그림 가운데 ‘누상위기도(樓上圍碁圖)’란 작품이 있다. 누각에 올라 바둑을 두는 이 그림 상단에는 장문의 제발이 있다. ‘서루기’라는 제목으로 서루라는 누각에 대한 기록이다. “내가 이 누정을 만든 것은 스스로 즐기고자 함만이 아니라 모든 군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장차 오는 자를 막지 않고 떠나는 자를 좇지 않으며 세상의 변화와 함께 흘러가고자 한다면 괜찮겠습니까?” 서루는 공유공간이자 세상과 더불어 변화하는 곳이란 얘기다. 서루기의 작가이자 서루 주인의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이 엿보인다.
그림읽기에 참여한 학자들의 그림 탐구영역은 방대하다. 고려불화부터 박영효의 양복을 입은 사진 한 장까지, 또 그림 자체인 회화에서부터 살상무기와 전법까지 다채롭다. 한 그림을 놓고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함께 들여다본 입체적 분석도 돋보인다.
관념산수화 정도로 보이는 그림에서 실물을 입증해내는 실사작업, 한강 일대에서 두호라 불린 지점을 추론하는 작업, 기계의 세부도에서 과학문명 교류를 읽어내는 등 그림 한장 한장을 통해 한국학의 영역이 한껏 넓어지는 느낌이다. 이 책의 다양한 그림 탐색은 단지 사실의 확인 차원을 넘어선다.이인상(1710~1760)의 ‘야매도(夜梅圖)’는 그 흔한 달빛 아래 핀 매화가 아닌 얼음등불에 비친 매화를 즐긴 문사들의 멋스러움을 보여주며 현대의 빈곤한 상상력을 넘어선다.
이윤미 기자/ 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