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내가 누구인지, 내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봤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독특한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주위 환경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자의적이기도 하고 타의적이기도 한 상황들이 발생하면서 서로 적응하고 동화되며 자신의 모습이 형성된다. 어제 만난 친구는 책을 좋아해 나도 책을 읽게 됐고, 오늘 만난 친구는 여행을 좋아해 나도 여행을 꿈꾸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형성된 한 사람 한 사람은 타인과의 상호교환적 관계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지만 간혹 생김새만으로 섣불리 상대를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성급한 평가는 오만한 믿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수가 그렇게 인정하기에 동조하는 소심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인간의 얼굴은 머리의 모양, 이마의 넓이, 눈매의 길이, 콧날의 높이, 귀의 크기, 입술의 두께, 피부의 색상 등의 요소들로 구성돼 있고, 놀랍게도 저마다 모양새를 유지하며 조화를 이룬다. 또 다른 이와 똑같은 꼴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고유한 얼굴 속에 내재하는 ‘내형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양한 모습일까? 누구도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얼굴은 자신을 나타내기에 둘도 없는 것이기에 화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자화상을 그렸다. 아마도 그들은 자화상을 그리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표출하고, 자신의 모습에 감탄을 자아냈을 것이다. 또 후세에 길이 길이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변웅필이 독일 유학시절 이래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인물 초상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51’. 최대한 디테일을 제거한 데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일그려뜨려 캔버스 속 초상은 작가 자신인 동시에 불특정 인간으로 전이된다. |
유럽에서 유학할 때 일이다. 현지에 처음 도착해 언어소통이 원활치 않던 때는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서도 현지인들로부터 이유 없는 차별을 종종 느꼈다. 아마도 자신들과 다른 동양인의 외모로부터 비롯된 선입견(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경험이 나로 하여금 작품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을 만들어내게 했다.
나만의 고유한 얼굴을 자의적으로 일그러뜨리거나, 특정부분을 감추고 보여준다면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들에게 익숙지 않은 내 모습을 보여주며 이것이 내 자화상이라고 주장해 과연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온전한 내 모습이 아닌, 또 하나의 괴기스런 모습을 창조하는 결과만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시도가 내가 하는 예술적 작업과 연관이 아주 깊은 것은 분명하다.
변웅필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6♡9’(왼쪽), 오른쪽은 ‘테잎’(각 120x100㎝, 유화) |
너무도 주관적 시선인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 아직도 공공연한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적 차별, 서로 경험해보지 못한 성별에 따른 섣부른 태도, 그리고 직업과 사회적 위치에 따른 계급적 판단 등. 이런 수많은 선입관과 편견들로부터 나 또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을 통해 진정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내게 별반 중요치 않다. 다만 새로운 모습을 대하는 것에 더욱 익숙해져야 하며, 그것의 형상이 가진 외면만 보지 말고, 내면의 모습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
글ㆍ그림=변웅필(화가)]
▶변웅필(41ㆍByen, Ung-Pil)은 대형 화폭에 얼굴만 커다랗게 자리잡은 초상 연작을 그리는 화가다. 대학(동국대)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올라 10여년간 뮌스터에 체류한 유학시절 자신의 정체성을 끈질기게 탐구하게 됐다. 무수한 드로잉을 통해 탄생한 그의 자화상 연작은 눈썹, 머리카락, 옷 등 인종을 나타내는 요소가 모두 사라진 데다, 손으로 얼굴 표정마저 자의적으로 망가뜨린 것이 특징. 디테일을 버리고 비움으로써 특정한 개인이 아닌, 보편적 인간에 다다른다. 단순하면서도 무표정한 인물 연작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묻고 있다.
최근에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매체의 정체성 탐구로 이어지고 있다.
이영란 기자/ 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