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상에 허락된 3일간의 외출
차비 빌리며 접근하는 한 남자
우연한 만남뒤엔 깊은 울림…
공기 속에 흩어져 있던 물방울들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안개로 내려앉은 도시, 시애틀의 가을이다. 여인의 얼굴은 안개 자욱한 도시처럼 도통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삶에 지친 발길은 물기에 젖은 것처럼 무겁다. 시애틀의 가을 햇빛은 잠깐이다. 관광버스 가이드가 말한다. “이맘때 시애틀은 늘 안개가 많고 비가 오는데, 지금은 해가 났네요. 햇빛을 즐기세요, 안개가 다시 끼기 전에.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후딱 갑니다. 즐기세요. 마음을 열고 지금 사랑하자고요!”
애나와 훈. 두 남녀는 잠깐 얼굴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시애틀의 햇빛처럼 서로에게 다가왔다. 사흘간의 짧고 운명적인 사랑. 달콤한 소풍처럼, 나른한 휴식처럼 불에 델 듯 뜨거운 격정으로 함께했던 짧은 순간은 영원으로 아로새겨진다.
영화 ‘만추’는 지금은 소실된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작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에 이어 네 번째 리메이크인 이번 영화는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무대를 시애틀로 옮기면서 다국적 프로젝트가 됐다. 문정숙-김지미-김혜자에 이어 ‘만추’의 4대 여 주인공은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로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중국 출신 여배우 탕웨이가 맡았다. 신성일-이정길-정동환에 이어 남자 주인공은 드라마 ‘시크릿가든’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현빈이 연기했다.
중국계 미국 여성인 애나는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인 죄수로, 수감 7년째 되던 해 어머니의 부고로 사흘간의 외출을 허락받고 시애틀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때 마침 쫓기듯 차에 오른 남자가 한국말로 말을 걸더니 대뜸 그녀에게 차비를 빌린다. 그는 교포 여성들에게 사랑을 팔며 사는 한국계 청년 훈이다. 시애틀에 도착해 각자의 발길을 돌렸던 두 남녀는 우연처럼 재회하고 하루를 동행한다. 연인처럼 근사한 곳에서 식사하고, 낯선 곳의 시장을 걸어 다니며 놀이공원을 찾는다. 하지만 훈은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애나는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이뤄질까.
미국에 온 지 2년 된 한국 청년을 연기한 현빈은 설정에 꼭 맞는 자연스러운 영어 연기를 보여준다. ‘시크릿가든’에서 ‘까칠한’ 재벌 2세 연기로 전 국민적인 화제를 모았던 현빈은 이번 영화에서는 팔 것이라곤 사랑, 그리고 몸과 말뿐인 남자가 된다. 기른 머리를 위로 잔뜩 부풀려 뒤로 넘겨 붙인 스타일의 현빈은 약간의 허세와 능청, 건들거림 이면에 여리고 깊은 연정을 간직한 인물을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현빈의 ‘새로운 발견’이다. 남편을 살해한 후 혼란에 싸여 흔들리는 눈빛과 맨발로 거리를 헤매는 첫 장면부터 탕웨이가 보여주는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세상으로부터 숨어 무겁게 내리깔린 여인의 마음에 해를 비추는 것은 남자의 경쾌함이다. 탕웨이의 묵직한 존재감에 현빈의 경쾌함이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의 미묘한 심리 묘사가 잔잔하게 파고를 이뤄가는 서정적인 작품이지만, 로맨스 영화로서 연인들이 즐길 만한 재미있는 대목이나 에피소드도 꽤 많다. 훈이 빌린 차비 대신 애나에게 시계를 맡긴 후 “몇 시냐”고 물으며 수작을 거는 장면이라든가, 입을 닫은 애나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식당에서 재치를 부리는 대목 등이 그렇다. 애나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훈과 애나, 애나의 옛 연인이 벌이는 소동도 웃음과 비애를 동시에 자아내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특히 영화 중반 시애틀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러 다니던 애나와 훈이 공사 중인 놀이공원 한 곳에 몰래 숨어, 다른 남녀의 2인극을 보며 일종의 복화술로 서로의 심정을 교감하는 환상적인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듯하다. 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