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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 최진욱,“리얼리즘은 가장 힘이 세거늘..”
"도대체 느낌이 왜 사라져 버린 거야?"
이 그림은 사라져버린 느낌을 되찾으려고 안타깝게 그려본 자화상이다.
나는 주로 눈앞의 사물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왔는데 1982년부터 자전거, 의자 등을 그렸다. 그러다가 1990년에 화실 전체로 시야를 확장했는데, 회색의 거친 붓 터치로 그리면서 ‘그림의 시작’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그 전엔 ‘수업 중’이었다.) 이 자화상은 1992년 작이다.
‘그림의 시작’을 통해 확장된 시각과 주제가 서로 맞아떨어져 흥분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 순간 느낌이 사라져버린 걸 알게 되었다. 도대체 느낌은 왜 사라졌는가?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당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 그리고 대중매체 환경의 변화로 작가들이 시간대 밖으로 튕겨져 나가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웃옷을 벗어던진채 캔버스와 마치 사투하듯 작업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최진욱의 자화상. 깨진 거울에 투영된 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과 하단에 놓인 보랏빛 국화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Acrylic on canvas. 116x91cm 1992.
그러나 지금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에 대한 믿음이 대단히 확고했던 것 같다. 지금은 회화에 대한 믿음이 시시각각 흔들린다. 그림과 타협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화가의 주된 업무가 된 것만 같다. 마치 목줄 놓친 귀머거리 강아지를 어둠 속에서 찾아 헤매는 것처럼 꿈과 현실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나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오곤 한다. 나의 취향과 정치성이 결국 내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긴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닌가. 1992년의 자화상을 보노라면, 또 그 당시에 그린 풍경화 같은 그림들을 보면 ‘내가 참 순수했구나’ 저절로 되뇌게 된다. 

그림의 시작
서울의 서쪽
눈앞의 대상에서 뭔가 느낌을 끄집어내려는 치열한 노력은 순수했던 만큼 가상한 것이고, 정말 옛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가 현재 그렇게 그림을 그릴 것인가?

미키마우스와 아톰을 섞어서 그린 작가가 나왔을 때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절대로 웃지 않는다. 현실을 나보다 훨씬 잘 꿰뚫어 보았으므로.

그러나 리얼리즘은 언제나 힘이 가장 세다. 내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리얼리즘의 자장 안에서 작품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시각각 흔들리는 현재의 내가, 확고했던 과거의 나를 대면하는 느낌은 묘하다.

그림 속 보라색 꽃은 별로 닮진 않았지만, 국화꽃이다. 화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준비한 정물 중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꽃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꽃을 화면에 들여오면서 뭔가 돌파구(내게는 아톰이나 미키마우스와도 같은)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웃통을 벗어젖힌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느낌이 왜 사라져 버린 거야?’
<글, 그림=최진욱(화가) >

시간 속으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부를 그린 최진욱의 작품 ‘임시정부5’. Oil on Canvas. 91x73 cm. 2009
▶서울 출신의 최진욱(Choi, Gene Uk, 55)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84년 죠지워싱턴대 대학원(회화전공)을 졸업했다. 그간 10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광주비엔날레(2002년), 부산비엔날레(2004년) 등 다수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 추계예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진욱은 세계와 나, 존재로서의 현상학적 체험의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끊임없이 달려가고, 미끄러지며 해체되는 상황과 한 시점을 치열하게 담아낸 그림은 ‘리얼리즘 회화의 본령’을 감상자 앞에 올곧게 드러낸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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